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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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1월 12일 49재 법문
종범스님 2022-01-12
今日 靈駕 至心諦廳 至心諦受금일 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 生老病死 憂悲苦惱 無明緣起 業識所現생로병사 우비고뇌 무명연기 업식소현佛身充滿 諸佛刹境 十方佛刹 莊嚴圓滿불신충만 제불찰경 시방불찰 장엄원만이로다나무아미타불 오늘 김동욱 영가님을 극락세계로 보내는 49재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극락세계가 어떤 곳인가. 사바세계와 다른 곳이다. 사바세계는, 사바라는 말은 범어인데, 한문으로면 감내해야 된다는 감자하고 인내해야 된다는 인자하고, 감인세계(堪忍世界)라고 그래요, 감인. 감내하고 인내해야 살아갈 수 있는 세계가 사바세계다. 그럼 극락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극락은 무유중고(無有衆苦)하고, 무유는 없단 말이죠. 있음이 없다. 중고, 온갖 고통이, 많을 중자, 고통 고자, 온갖 고통이 하나도 없고 단수제락(但受諸樂)이라, 다만 모든 즐거움만 있다. 그래서 극락이라는 것은 즐거움의 궁극이다. 그래가지고 극락세계에는 즐거움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요. 그거밖에 없으면 다른 게 없기 때문에 있는 줄 모르거든요. 그래서 불교에서 제사를 천도(薦度)라 그러는데, 천도는 그쪽으로 인도한다, 이런 뜻이거든요. 사바세계에서 극락세계로 인도해드리는 일이다. 그런 뜻이고요. 이 사바세계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는데, 그 생로병사는 우비고뇌(憂悲苦惱)가 있다.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걱정하고 이걸 사바세계 생로병사 우비고뇌 이렇게 가르쳐요. 사바세계는 생로병사가 있고 우비고뇌가 있다. 그러면 이 생로병사 우비고뇌가 어디서 왔는가. 무명에서 왔다(無明緣起). 무명은 없을 무자, 밝을 명자, 밝음이 없는 데서 왔다, 이렇게 가르쳐요. 그럼 밝음이라는 건 뭔가. 이 세상은 나와 우주를 포함해서 하나뿐인데, 일법계(一法界), 한 일자, 법 법자, 세계 계자, 일법계, 일 진실 뿐인데, 그 일법계 일 진실을 알지 못하는 걸 무명이라고 한다 이거에요. 그래서 일법계를 아는 밝은 지혜가 없다. 밝은 지혜가 없는 걸 무명이라고 하고. 그래서 생로병사 우비고뇌는 한 법계, 한 진실을 알지 못하는 밝음이 없는 데서부터 시작이 됐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불교에요. 그래가지고 그 한 법계를 알지 못하는 걸 무명이라고 하는 하는데, 그 무명에는 업이 따른다. 업은 행동인데요. 모르면 모르는 행동이 나온다, 이거죠. 알면 아는 행동이 나오고. 그래서 그 업으로 나타난 바다(業識所現). 어려워지네요. 이 세상 하나밖에 없어요. 죽고 사는 게 없어요. 내가 태어날 때 그게 처음이 아니고요. 내가 세상을 떠날 때 그게 마지막이 아니에요. 그런데 나만 알고 법계를 모르니까, 내가 나는 순간은 처음이라고 알고 있고, 내가 가는 순간을 마지막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거 아니에요. 내가 세상에 나오나 안 나오나 똑같아요. 그걸 모르고 내 몸만 아니까, 몸만 알고 하나를 모르니까, 그걸 무명이라고 하고, 그 몸만 아는 생각이 나오고, 몸만 하는 행위가 나와서, 그 생각과 행위로 여러 가지 생로병사하고 우비고뇌의 고통이 따른다. 그럼 불교는 깨달음인데 석가모니가 뭘 깨달았나. 하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일법계. 하나를 깨닫고 보니까, 그 깨닫는 순간에 생각이 지혜로 변하고, 그 생각은 무명이 아니라 광명이다. 그리고 생각이 지혜로 변할 때, 이 하늘과 땅이 완전히 광명으로 변하는 웅장함이 있어요. 그래서 절에 가면 대웅(大雄)이라는 간판이 붙었고, 대광명(大光明)이라고 하는 간판이 붙어 있거든요. 대광명은 무명이 광명으로 변했다는 소리고, 대웅이라는 것은 하나를 깨달은 웅장함, 그걸 대웅이라고 해요. 그래서 이 사바세계는 무명이고 극락세계는 광명이다. 그러면 이 사바세계는 무명에서 뭐가 나오냐. 속박(束縛)이 나와요, 무명에서부터는. 얽힐 속, 얽힐 박. 얽혀 있어요. 매여 있어요. 어디에 매여 있냐. 내 몸에 매인 거예요. 한 법계를 알면 몸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예요. 한 법계를 모르니까 몸이 전부인 거예요. 그러니까 산에 가서 풀 한 포기 보면 그걸 알아요. 저 풀 한 포기가 있어도 산이고, 없어도 산이라는 거 알아요. 그러면 이 우주 법계에서 내 한 몸이 있어도 한 법계예요. 없어도 한 법계인데, 그건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전부예요. 그래서 몸의 속박도 있고, 그다음에 사람의 속박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 반드시 붙들려고 애를 쓰지요. 물질의 속박도 있고. 이런 속박이 있는 거예요. 이게 무명의 고통이죠. 그다음에는 공포가 있어요. 두려움. ‘내가 구하는 게 구해지지 않으면 어떡하나’, 이런 두려움이 있단 말이에요. 또 불안이 있어요. 편안하지 않아요. 그다음에 고뇌가 있다. 괴롭고 걱정이 돼요. 그런데 깨달음을 통해서, 깨달을 각자, 이 불안하고 근심하는 생각이 지혜로 확 바뀌는 순간에 무명이 광명이 되고, 그 속박이 해탈이 돼요. 그 일법계를 깨닫는 순간에 속박은 전혀 없어요. 그걸 해탈이라고 해요. 다 벗어났다, 풀렸다. 풀릴 해자, 벗어날 탈자, 해탈(解脫). 그리고 그 깨달음을 얻어서 지혜가 이루어지는 순간에 공포가 환희가 돼요. 그래서 불교 경전에는 즐거울 환자, 기쁠 희자, 환희(歡喜)라는 말이 많이 나와요. 그게 깨달음의 공덕이에요. 깨달음을 통해서 얻은 내용이다, 그거지요. 그리고 불안이 안락이 돼요. 불안한데 좋은 음식을 먹어도 그때뿐이고, 바로 불안한 마음이 어딘가 스며들어 있어요. 좋은 걸 봐도 그렇고. 그런데 불안한데 이 깨달음으로 얻어서 광명을 찾으면 안락(安樂), 편안하고 즐거워요. 그리고 이 고뇌가 괴로움, 걱정 없는 즐거움을 얻어서 그걸 극락이라고 그런다. 고뇌가 극락이 됐다. 그 세계로 보내드리려고 지금 오신 거예요. 그러면 이 재를 올리는 건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보은, 돌아가신 분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하는 거고요. 둘째는 본인의 공덕이 있어요. 이 재를 하는 동안에, 재에 참여를 하면서, 내 생각과 몸에 지혜와 광명의 종자가 스며들어서, 그게 나중에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돼요. 그래서 공덕을 착할 선자, 뿌리 근 자, 선근(善根)이라고 그러는데 선근, 착한 종자가 된다, 이 말이죠. 뿌리라는 거. 그러니까 재 지내는 건 참 좋은 거예요. 부모에 대한 보은도 되고, 나 자신에 대한 선근이 된다. 착한 뿌리가 된다, 이 말이죠. 근데 이 극락세계는 깨달음을 통해서 얻어진 거예요. 그래서 깨달음을 통해서 얻어진 순간에 그 지혜의 몸이 법계에 가득하다. 그걸 불신이 충만법계(佛身充滿)라고 그래요. 부처님 몸은 깨달은 몸이거든요. 태어난 몸은 바로 사라지는데, 깨달은 몸은 법계에 가득해요. 그래서 충만법계해서 시방불찰(十方佛刹)에, 시방에, 찰이라는 게 사찰인데, 이 사는 중국의 행정 관청 이름이고요, 중국 발음은 시라고 하는데, 그런데 인도에서 어떤 스님이 말을 타고 경전을 싣고 오셨는데, 그 말을 보호하던 행정 관청이 그게 시거든요. 그래서 그 시는 이 사라고 발음을 하는데, 그게 중국 발음이고요. 찰은 차트라라고 하는 언어인데 국토라는 뜻이에요. 국토, 나라 땅. 그래서 중국 발음 사하고 인도 발음 차트라하고 합쳐서 사찰이라고 하는데요. 그 사찰은 부처님이 본 세상이라는 뜻이에요. 부처님이 본 세상이다. 그래서 중국 행정관청은 그 당시 무슨 시, 무슨 시, 무슨 시가 있거든요. 그것 중에 하나에요. 그래서 사찰, 사원, 이러는데, 꾸며진 모든 게 깨달은 극락세계에 대한 표현이에요. 대웅전도 그렇고 대광명도 그렇고, 저 연꽃도 그렇고, 다 깨달음에서 얻어진 극락세계를 표현하는데, 그걸 불교 용어로는 장엄(莊嚴)이라고 그럽니다. 장엄. 장엄은 다 꾸민다는 말이잖아요. 그래서 극락세계가 눈에 안 보이니까 이 장엄을 통해서 극락세계를 느끼라고 그렇게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 시방불찰에는, 시방에 온 우주에 있는 이 불찰에는, 장엄이 원만하거든요. 근심 걱정 없다. 근심 걱정은 우주 법계가 하나라는 걸 모르는 데서 오는 어리석음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다음에 이제 극락세계에 대한 얘기인데요. 常住法界 眞言宫中 般若海會 寂滅道場 상주법계 진언궁중 반야해회 적멸도량大智光明 安養淨土 華藏莊嚴 極樂世界대지광명 안양정토 화장장엄 극락세계로다나무아미타불 나무라는 말은 돌아간다는 말이고, 아미타라는 건 무량수라는 뜻이고, 한량없는 수명, 또 무량광이라는 뜻이 한량없는 광명, 그게 극락세계에요. 깨달은 세계의 이 몸은 그걸 지신이라고도 하고 불신이라고 하는데, 지혜몸, 깨달은 몸, 수명이 무량하고 광명이 무량하다. 그런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나무라고 하는 건 범어인데, 귀의한다, 귀원(歸元)한다, 돌아갈 귀자, 근원이라는 원자, 귀원, 근원으로 돌아간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바세계에서 극락세계로 가는 걸 나무아미타불이라고 그래요. 나 어릴 때 나무아미타불은 스님들만 하는 건 줄 알고, 스님 지나가시면 인사로 나무아미타불 이랬어요. 나무아미타불 그것도 공덕이 됐는가 봐요. 그런 걸로 절에 온 것 같아요. 나무아미타불, 그러니까 수명이 무량하면 죽음이 없다는 뜻이잖아요. 광명이 무량하면 어두움이 없다는 뜻이잖아요. 그게 극락세계거든요. 죽음도 없고 어둠도 없는 세계로 돌아간다. 나무아미타불. 이런다고요. 이 극락세계는 상주법계(常住法界)에요. 항상 머무는 법계다. 또 진언궁중(眞言宫中)이에요. 참을 드러내는 궁전 가운데다. 말이라는 건 드러내는 거잖아요. 이게 진언이라고 하는 건 참된 걸 드러내는 궁중이다. 진언궁중. 반야해회(般若海會)다, 반야라는 것은 이 형상에서 형상이 없는 공격을 보는 게 반야예요. 이게 이제 물질인데, 이걸 떡 보면 이 형상은 유생유멸인데, 이렇게 나타난 것도 있고 사라지는 것도 유생유멸인데, 이건 생각으로 본 거고 반야로 보면 이게 불생불멸이에요. 그래서 유생유멸에서 불생불멸을 보는 걸 반야라고 해요. 생각으로 보면 이건(물컵을 가르치시며) 생겨난 거죠. 근데 이걸 근원으로 보면 생겨도 생긴 게 없어요. 왜냐면 흙으로 뭉쳐진 것일 뿐이지 이게 자체가 없어요. 이게 너무 오묘해서 말만 들어도 설레는데요. 이 몸도 여러 가지 요소가 뭉쳐졌을 뿐이지 자체가 없어서 생겨도 생긴 게 아니고 사라져도 사라진 게 아니라, 반야로 우리 몸을 다 관찰하면, -그 관찰해서 보는 걸 조견(照見)이라고 그러는데요. 조명이라는 조자, 볼 견자,- 이 몸이 불생불멸이에요. 난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 그러는데요, 큰 그런 반야로 생로병사가 없는 저 극락세계로 건너간다. 이걸 바라밀이라고 하거든요. 이 반야 세상이 극락세계에요. 그걸 바다 해자, 모일 회자, 전체 바다는 전체잖아요. 전체 그것만이 모여 있는 해회, 반야해회. 적멸도량(寂滅道場), 도량은 장소라는 뜻인데요. 생멸이 없는 그 장소, 그 말이에요. 그게 극락세계에요. 대지광명(大智光明)이라. 대지는 큰 대자, 지혜 지자인데, 이 대지는 정각 공덕으로 대지출(正覺功德大智出)이라. 그 깨달은 공덕으로 지혜가 나왔다. 깨닫기 전에는 대지가 안 나와요. 그래서 이 대지로 밝히는 세계가 극락세계다. 대지. 안양정토(安養淨土), 마을 이름도 안양이라는 데가 있는데요. 그게 불교 용어인데, 편안할 안자, 기를 양자인데, 거기서는 즐거울 락자와 같은 뜻이에요. 안락(安樂)이라는 뜻입니다. 옛날 한자 용례에 보면 양은 락야라, 기를 양자는 즐겁다는 뜻이다. 그런 용례가 있어요. 그래서 극락암이라는 절도 있고 안양암이라는 절도 있는데, 똑같은 말을 쓰기 싫어하는 거예요. 같은 말이에요. 안양정토라, 편안하고 즐거운 깨끗한 토, 정자는 죽고 사는 게 없다는 뜻이에요. 무덤도 없고. 없다는 거죠. 왜냐하면 색이 공하니까 이 세상에 더러운 건 하나도 없어요. 더러운 건 이 형상을 보고 판단하는 게 더러운 거죠. 이 반야로 보면 색이 공하니까 이걸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그러거든요. 색즉시공이라는 옛날에 영화도 나와 있었어요, 색즉시공. 근데 딴 걸로 번역해서 말하더라고요. 색이라는 건 형태라는 뜻이에요. 근데 영화에서는 남녀가 만나는 걸 색이라고 번역을 했더라고요, 그거야 뭐 어찌 번역하든 내가 알 바 아닌데. 평생이 공한 걸 보면 이 세상에 더러운 건 없어요. 대변을 봐도 그것이 공한 걸 반야로 보면 더러움 자체가 없어요. 죽음을 봐도 반야로 보면 죽음 자체가 없어요. 색이 공이에요. 공은 불생불멸이고 색은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고, 이루어졌다 머물다가 파괴되다가 사라지는 거. 반야로 떡 보면 이 생멸 현상에서 생멸이 없는 적멸도량으로 들어가는데 그 적멸도량은 피안이라고 하거든요. 피안 저쪽, 저쪽 세계. 그래서 안양정토다. 화장장엄(華藏莊嚴)이다. 화장이라는 꽃 화자, 감출 장자인데, 여러 가지 공덕으로 저장돼 있다. 이게 화장이고요. 공덕으로 저장돼서 꾸며져 있다. 이걸 장엄이라고 하거든요. 그게 극락세계에요. 극락세계는 모두가 즐거워서 즐거운 줄도 모르게 즐겁다, 이게 극락이에요. 즐거운 거 아는 건 그건 안락인데 안락은 즐거운 걸 알아요. ‘아 편안하다’, ‘아 좋다’ 이게 안락이거든요. 근데 극락은 편안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으니까 즐거운 것을 모르는 거예요. 요새 행복이라는 말 많이 쓰는데 행복이라는 건 행복을 전혀 못 느끼고 사는 게 그게 행복이에요. ‘아 나는 행복하다’ 그러면 그 순간뿐이에요. 진짜 행복하면요, 행복이 뭔지도 몰라요. 그냥 고통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극락세계가 그런 거거든요. 궁극적인 편안함이라. 궁극안락. 覺心初起 心無初相 無終無始 常放光明 각심초기 심무초상 무종무시 상방광명壽光無量 極樂世界 常壽無窮 常光無邊수광무량 극락세계 상수무궁 상광무변이로다나무아미타불 스님들만 나무아미타불 할 게 아니라 나무아미타불을 한 번도 안 해본 분들도 연습으로 한번 해보실래요. 연습으로 극락 가면 되거든요. 그 형식 갖추지 말고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형식 하나도 없어요. 그냥 하면 돼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만하실까요. 아미타불을 연습해 보면 좋아요. 나쁜 건 하나도 아니거든요. 죽음이 없고 두려움이 없는 세상으로 돌아간다. 그거 얼마나 좋아요. 나무아미타불. 그런데 이 사바세계의 속박과 또는 공포와 불안과 고뇌가 어디서 왔느냐. 한마음이 미혹(迷惑)한 데서 왔다. 한마음이 이 우주법계가 일법계라는 걸 모르는 미혹에서 왔다, 이거예요. 일법계의 미혹상, 한 법계를 미혹한 그 지점에서 와서 모든 고뇌는 일법계 미혹상이다. 그 미혹이 뭐냐. 이렇게 하나를 보고 하나인 줄 모르고 둘로 봤다는 거죠. 하나를 둘로 봤다 이거예요. 그 둘로 보는 순간에 그 모든 에너지가 발동을 해서 그게 속박이 되고 그게 공포가 되고 그게 고통이 돼버렸어요. 그러면 그 처음에 하나에서 하나를 모르는 것이 뭐냐. 잠든 거와 같다고 가르쳐요. 잠이 들면 보이는 게 없거든요. 일법계를 못 보고 잠드는 거와 같다. 그럼 잠들면 어찌 되냐. 꿈을 꿔요. 그걸 몽상이라고 그러는데. 꿈에는 보는 게 있거든요. 그런데 꿈꾸는 동안에는 자기가 보고 있는 게 꿈이라는 걸 몰라요. 예를 들면 꿈에서는 꿈을 모른다. 그럼 꿈을 언제 아나. 꿈을 깨고 나면 알거든요. 꿈을 딱 깼을 때 ‘내가 꿈 꿨구나’를 알지, 꿈꾸는 도중에는 꿈인 줄은 모른단 말이죠. 그럼 꿈 깨고 나면 꿈은 없었다, 이걸 알게 돼요. 그런데 꿈꾸는 동안에는 꿈이 있어요. 그래서 깨닫고 보면 생로병사가 없는 거예요. 생로병사는 꿈속에 일이다. 깨달은 사람들은 부처라고 보면 돼요. 여러 부처를 제불이라고 하거든요. 제불에는 대광명뿐이지 생로병사가 없어요. 잠들어서 꿈꾼 마음을 깨달으면 이걸 각심초기(覺心初起)라고 하는데, 심초기라는 건 그 꿈꾸는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생각 그걸 깨달아 버리면, 꿈꾸는 처음 생각을 깨달으면, 그 꿈꾼 마음은 없었다 이거예요. 이래서 문제인 거예요. 억울해요. 깨닫고 보면 없는 걸 가지고, 깨닫기 전에는 이렇게 고생을 하니 얼마나 억울해요. 얼마나 분통이 터져요. 그래서 각심초기하면, 그 꿈꾸는 처음 일어난 마음을 깨달으면, 심무초상(心無初相)이라,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본래 마음은 처음 꿈꾸는 마음이 없었다. 초상, 처음 생각이 없었다는 거지요. 그래가지고 그 꿈꾸는 마음이 없는 그 깨달은 마음으로 보면 무종무시(無終無始)라, 마지막도 없고 처음도 없고 상방광명(常放光明)이라 항상 밝다, 광명을 일으킨다. 그래서 깨달은 분들에게는 생로병사가 없고요.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생로병사가 있는데, 깬 사람은 꿈이 없고, 꿈꾸는 사람에게는 꿈에서 보는 것이 있다, 이런 겁니다. 극락 가기가 너무 쉬워요. 한 생각으로만 돌아가면 바로 극락 가는 거예요. 두 생각으로 생사가 있었기 때문에, 한 생각으로 돌아가면 극락 가는 거예요. 그냥 가만히 앉아서 한 생각이 이루어지면 극락 가요. 근데 이 생각도 생각하다 보면 그게 생로병사인 거예요. 무종무시 상방 광명 수광무량 극락세계(壽光無量 極樂世界), 수명과 광명이 한량없는 극락세계, 상수무궁(常壽無窮)이라, 항상 한 수명이 다함이 없어요. 끝이 없다, 이거지요. 또 상광무변(常光無邊)이라, 항상 밝은 그 광명이 변방이 없다. 중심부가 없고 주변부가 없다 이거죠. 그러하니 극락세계는 이러하고, 오늘 영가께서 이 법회를 통해서 어떻게 가시냐. 佛身周遍等法界 普應衆生悉現前 불신주편등법계 보응중생실현전種種教門常化誘 於法自在能開悟종종교문상화유 어법자재능개오 (華嚴經제2권, 世主妙嚴品)(화엄경 제2권, 세주묘엄경) 今日 靈駕 至心諦廳 至心諦受금일 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一念成一念 淨土即現前 일념성일념 정토즉현전面見阿彌陀 往生安樂利면견아미타하고 왕생안락찰하소서나무아미타불 본래는 한 생각뿐이었는데, 모든 걸 봐도 하나로 본다는 거지요. 모든 걸 들어도 하나로 듣고, 모든 움직임을 움직여도 하나로 움직이고 그랬는데, 잠드는 것처럼 슬며시 모든 순간에서부터 하나를 보지 못하고 둘을 봤어요. 그래서 둘을 보면 좋고 나쁜 게 있고 취하고 버릴 게 있어서 거기서 속박 집착이 생기고 고통이 왔는데, 다시 한 생각이 한 생각으로 돌아오면, 한 생각으로 보고, 한 생각으로 움직이고 한 생각으로 행동하면 속박이 전혀 없어요. 고통은 두 생각에서 온단 말이에요. 두 생각을 두 생각이라고 안 하고 여러 가지가 섞였다. 여러 가지 잡자가 있는데 그걸 잡념(雜念)이라고 그래요. 잡이라는 건 이것저것 함께 있다 이 말이거든요. 그래서 일념 잡념. 그래서 모든 고통은 잡념에서 오고 극락세계는 일념에서 온다. 그 원인은 아주 간단해요. 그러니까 알고 보면 잡념이 더 어렵고 일념이 더 쉽거든요. 그래서 오늘 영가가 극락 가는 일은 너무 간단하다. 일념이 성일념하면(一念成一念), 한 생각이 한 생각을 이루면, 정토가 즉현전이라(淨土即現前), 더러움이 없는 극락세계의 국토가 곧 눈앞에 나타난다. 면전아미타하고(面見阿彌陀), 바로 대면해서 아미타불을 보고, 왕생안락찰(往生安樂利)하소서, 왕생이라는 게 가서 난다 이거죠. 안락찰, 극락세계인데, 안락한 세계, 안락한 국토에 왕생하소서, 이 말이에요. 일념은 본래 두 생각이 생기기 전에 그 생각을 일념이라고 하고요. 또 일념이 일념을 이루었을 때 그 마지막 일념은 여러 가지 잡념이 있다가, 그 잡념이 다시 한 생각으로 된 생각을 일념을 이루었다, 이렇게 하거든요. 우리가 지금 일념이 아니고 잡념으로 사는데, 극락 가려면 잡념이 다시 일념으로 형성되면 극락세계가 바로 보이는 거예요. 어떤 분들은 ‘극락세계가 정말 있습니까’, 묻는 분들도 있거든요. ‘있다.’ ‘어딨냐.’ ‘눈앞에 있다.’ ‘왜 나한테는 안 보입니까.’ ‘그건 한 생각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안 보인다.’ 그러는데. ‘글쎄요’ 이러고 왔다 갔다 하더라고요, 고개를. 안 믿는 게 당연한 거죠. 워낙 잡념에 빠져서 사니까. 어려워요, 믿는 게. 그래서 일념으로 일념을 이룬다라고 할 때, 그 첫 번째 일념은 비율로 설명할 때 360도 중에서 0도라는 거예요. 첫 번째 일념은. 그러면 그 0도에서 어떻게 해야 되냐. 180도로 해서 다시 이제 360로 돌아오면, 0도에서 출발해서 360도로 돌아오면 똑같아요. 그 첫 번째 일념은 0도고 나중에 일념은 360도다. 똑같은데 전혀 틀려요. 그러니까 우리가 본래 일념이었어요. 본래 한 생각이었는데 세상에 온갖 집착과 속박에 사는 잡념이 끼어들어가지고, 공포 불안 고뇌를 겪다가 다시 또 일념으로 들어가면 그게 일념이 일념을 이루는 건데 그거는 0도에서 360도로 돌아온 거다. 그러니까 극락 가기가 얼마나 쉬운가. 택시 부를 것도 없어요. 걸어갈 것도 없고 무슨 뭐 여행 수속 밟을 거 전혀 없어요. 한 생각이 한 생각으로 돌아가면 극락왕생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염불도 듣고, 보고, 공양도 올리고 하니 얼마나 극락 가기가 쉬울 것인가. 그래서 어렵게 가지 마시고 바로 눈앞에서 가십시오. 그런 법문을 해드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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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천일기도회향] 1월 9일 천독다라니기도 회향 및 대웅전 천일기도 회향법문
가섭스님 2022-01-09
반갑습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죠. 무슨 날이에요? 법해 스님께서 명확하게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그냥 좋은 날입니다. 오늘은 참 좋은 날이에요. 또 이렇게 많은 분들이 법석을 함께해 주셔서 더욱더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천일이라는 시간은 이 우주적 시간으로 보면 아주 티끌만큼 작은 시간이고, 또 지구의 나이에 비해서도 티끌만치 작은 시간이에요. 개인의 역사로 봤을 때, 요즘에는 80까지 산다고 쳤을 때, 80년 동안에 그 무언가를 위해서 3년간을 오롯하게 일심으로 여일하게 정진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짧거나 얇거나 그렇지 않죠. 또 진관사 창건 이래로 봐도 천일기도는 참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돌이켜 보면 진관사의 모든 대중들에게 이보다 더 큰 복은 없다. 그중에서도 꼭 집어서 얘기를 하면은, 우리 총무 법해 스님이 복이 제일 많은 것 같고요. 훌륭한 상좌를 둬서 옆에서 천일기도 회향을 하는 것 자체가 큰 복이 아닌가 생각을 하고요. 그리고 덕원 스님이 이렇게도 견디고 저렇게도 인내했던 그 공력이 의미가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천일기도는 덕원스님 개인을 위해서도 기도를 했지만, 천일기도라고 하는 것이 개인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진관사에 있는, 진관사에 소속돼 있는 모든 신도들을 위해서 기도를 했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나라의,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화평하기를 기도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서 개인이 힘들고 어렵고 또 마음에 여러 가지 올라오는 것들을 잘 제어하면서 기도를 했는데, 그런 것들을 잘 받아 가려면 이제는 여러분들이 역할을 해줘야 된다 하는 거죠.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느냐. 덕원 스님을 잘 모시고 잘 찬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짜 덕원 스님이 천 일 동안에 뭘 위해서 기도했는가를 생각해야 돼요. 뭘 위해서 기도했을까요. 아마도 마음의 갈애와 마음의 번뇌를 잘 덜어내려고 기도했을 거예요. 여러분의 마음에서도 여러분의 갈애와 여러분의 번뇌를 잘 덜어내는 게 중요하다라는 거예요. 그걸 배워가야 된다는 거예요. 뭘 채우려고 했던 게 아니라, 아마도 그 천 일 동안에는 덜어내고 비워내기 위한 시간이었을 거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천일기도 그러면 성취, 그러니까 뭔가를 채우고 뭔가를 이룬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그 성취라고 할 때의 그 성취는, 이룬다는 것은 채움의 이룸이 아니라 비움의 이룸이라는 거에요, 비움. 그걸 우리가 정말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마음에 있는 갈애, 갈애라는 게 뭐예요. 갈증이에요. 갈증. 누군가에게 자기의 마음을, 자기의 빈 곳을 누군가가 채워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사람이 됐든 물질이 됐든 간에 자기의 빈 마음을 채워주기를 바라는 그 바람, 그 갈증. 그런데 그 갈증을 부처님의 마음으로 채워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우리는 물질적인 거나 아니면 내가 지금 눈에 보이는 상대방에게 그걸 채우려고 하다 보니까 바람대로 안 되면 어떻게 돼요. 바람대로 안 되면 투정 부리게 되잖아요, 짜증 내게 돼요. 그래서 이 마음의 갈애와 번뇌를 얼마큼 잘 제어하고 비워갈 거냐. 그런 것이, 우리가 그것을 잘 기억해내는 것이 오늘 천일기도 회향하는 덕원 스님의 기도의 공력을 그대로 잘 받아내는 거다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금요일 오래 인연이 있는 스님이 갑자기 종단에 큰 소임을 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소임을 그만두고 선방을 갔다고 그래요. 저기 산청에 깊은 산중에 법당 하나밖에 없어요, 건물이. 거기에 무문관이라고 하는 수행터에서 정진을 하고 있어서, 산속을 차를 몰고 -도로에서도 한 20분 들어가야 돼요,- 산꼭대기로 갔는데, 제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큰 광고판이 붙어 있는 걸 봤어요. 그 광고판이 아마 아이들 학습지를 만드는 회사 같아요. 그런데 그 광고를 보고 내가 깜짝 놀랐어요. 운전하다 보면 잠이 올락말락 할 때 있잖아요. 근데 그 광고 문구를 보고 정신이 바짝 났어요. 뭐라고 쓰여 있느냐 그러면, <사유하고 행동하라>. 일반 아이들 학습지 광구인데 뭐라고 쓰여 있냐면, <사유하고 행동하라>, 이렇게 쓰여 있는 거예요. 옛날에 어르신들한테 법문 듣다가 뒤통수 한 대 딱 얻어맞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 때 있거든요. 그런 것처럼 운전하다가 정신이 바짝 났어요. <사유하고 행동하라>, ‘나는 과연 저렇게 사유화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이런 반조가 되면서, 어떻게 저런 카피를 학습지에서 했는지. 만약에 정말로 그 학습지 광고한 것처럼 그 회사가 아이들에게 그렇게만 가르쳐도 조만간에 한 10년간, 10년 뒤에, 세계에서 제일 뛰어난 나라가 되지 않을까. 물질이나 경제 규모가 아니라 행복 지수로 정말 최고의 나라가 되지 않을까. 근데 우리나라가 경제 지수는 세계 7위니 탑 텐이니 뭐라고 얘기를 많이 하는데, 행복 지수를 올리게 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버는 걸 얼마큼 잘 쓰게 해 주느냐, 잘 쓰게 할 수 있느냐 이게 관건이에요. 근데 아직까지도 잘 벌게 해달라고 기도를 많이 하거든요. 뭐냐하면 아직도 채우려고 하는 습성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그런 비유를 하나 들고 싶어요. 바다에서는 뭐가 나요? 바다에서는 해산물이 나잖아요. 산에서는 나물도 나고 산삼도 나고 그러죠. 근데 바다에 가서 산삼이나 나물을 얻으려 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잖아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뭐냐면 바다에서 해산물 원하는 거는 잘못된 게 아니에요. 바다에서 나물이나 산삼을 원하는 게 나쁜 거지, 바다에서 해산물을 얻는 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거죠. 이 얘기를 왜 드리냐 그러면 내 마음에 번뇌가 사라지고 갈애가 사라지고 평화롭고 고요하고 따뜻하고 맑고 온화하고 그거를 바라려면은 그 마음밭으로 바꿔야 한다 이 말이에요. 그게 천일기도를 한 이유에요. 그런데 덕원 스님이 천일기도 열심히 해서 회향을 맞이했는데 여러분의 마음밭은 아직도 바닷속이에요. 여기서 금을 원하고 산삼을 원하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 마음밭을 바꿔야 돼요. 변화시켜야 돼요. 그 말씀을 드리려고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마음밭을 바꾸자. 내 마음 밭을 바꾸려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갈애, 갈증, 목마름 이런 것들을 좀 내려놓고, 혹시라도 그런 게 있다면 내려놓고, 마음에 번뇌도 내려놓고 마음을 한번 차분히 들여다 봐요. 여러분이 기도할 때,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그래도 진관사에서 나름 열심히 기도하는 분들이니까 다 아시겠지만, 마음이 산란할 때는 공부, 경전을 읽거나 기도를 하는 게 아니에요. 뭘 해야 돼요? 마음이 산란할 때는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이 산란한 마음을 먼저 가라앉혀 그거부터 없애야 해요. 근데 이제 마음이 확 산란해 있는데 ‘그래 기도를 하라고 그랬지.’ ‘기도를 해야 되겠구나’, 경전을 읽어요. 그러면 마음은 가라앉는 것 같아도 그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게 뭐냐 그러면, 마음이 혼란하거나 마음이 번잡스럽거나 마음이 들떠 있거나, 쉽게 말하면 마음이 화나 있을 때는 그 화 나 있는 걸 가라앉히고 기도를 해야 돼요. 물론 이제 공덕이 많은 분들은 기도하다 보면 그 화난 마음이 가라앉고 사라지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갈애와 번뇌가 일어날 때는 그걸 잘 가라앉혀야 되는데. 경전에 보면은요, 놀라운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그 경전 구절을 보고 탄복을 한 적이 있는데, 무슨 구절이냐 그러면, <사라질 번뇌에 사라지라고 집착한다>. 다시 한 번 더 할게요. <사라질 번뇌에, 사라질 번뇌를, 사라지라고 집착한다.> 여기서 이미 게임이 끝나버렸어요. 게임 오버. 게임이 끝났어요. 여기서 모든 게, 내가 현재 마음이 지글지글 막 보글보글 끓는 그 마음은 이미 사라질 거란 말이에요. 무상무아의 이치라는 게 있잖아요. 근데 거기에 딱 들러붙어가지고, ‘번뇌야 사라져라, 번뇌야 사라져라’ 그냥 씨름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혹여라도 괴로움이 있거나 갈등이 있거나 마음이 아픈 그런 것들이 있다면 그건 언젠가 사라진다는 거에요. 사라지는 거 붙들고 지금 사라지지 말라고, 사라지라고 주문하면서 사라지지 말라고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만 잘 생각하면 마음 위치를 싹 체득할 수가 있어요. 우리는 그 방법을 그 마음의 습관 때문에 그걸 계속 반복하고 있는 거예요. <사라질 번뇌에 사라지라고 집착하고 있다.> 이것을 명심하시고 우리 덕원 스님의 천일기도 회향을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그 공력 잊지 마시고, 공력을 잊지 않는 방법은 마음의 갈애와 번뇌를 우리가 비워내는 거다. 그 갈애와 번뇌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사라질 번뇌이기 때문에 사라지라고 집착하지 마라. 여러분 마음속에 늘 부처님의 미소와 함께 하는 그런 호랑이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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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1월3일 음력 12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2-01-03
-공양 이야기-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신축년 섣달 초하루고요, 신년 1월 3일입니다. 초하루 기도들 잘 하시고요. 신년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법문은 공양 이야기, 공양 올리는 이야기, 이런 내용입니다. 공양은 참 중요한 겁니다. 우리 범부 중생이 제불 보살과 만나는 행위예요. 공양을 통해서 삼세 제불과 만나고 일체 보살과 만나서 우리가 복덕을 이루고 지혜를 이루어서 깨달음을 이루는 그런 인연이고 그런 공덕입니다. 그런데 공양에는 공양 작법(供養作法)이 있는데요. 작법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의 순서입니다. 사물이, 일과 물건이 펼치기 위해서는 순서가 필요하거든요. 이런 순서를 지을 작자, 법 법자, 법을 지어 나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요. 공양, 공양을 올리는 것을 받들 헌자, 공양 공자, 헌공(獻供)이라고 하고, 올린다고 하는 올릴 상자, 공양 공자, 상공이라고도 하고 그러는데요. 이 헌공, 상공작법은 제일 먼저 거불(擧佛)이라고 있는데, 들 거자, 부처님 불자인데, 거불은 소청(召請)을 말해요. 불러서 청하는 거. 그래서 모든 공양의식에는 제일 먼저 거불작법이 있어요. 이 거불작법은 소청의식입니다. 일체의 불보살님들을 이 공양하는 법당에 불러서 청해 모시는 그런 의식이거든요. 그래서 소청을 하고 나면 유치(由致)라고 있는데, 유치는 말미암을 유자, 이 치자, 말미암는다. 지금은 공양을 올리는 사유, 공양을 올리는 일이 어떻게 시작이 돼서 어떻게 펼쳐지고 있다. 그 공양을 시작하는 인연 사유를 말씀드리는 게 유치고 그다음에 청사(請詞)가 있어요. 일체 불보살님들을 청하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유치 청사 이렇게 청하는 말씀으로 제불 보살을 모시고 난 다음에는, 공양을 올릴 순서인데 공양을 올리는 데는 그냥 우리 범부가 아는 향이면 향, 꽃이면 꽃이 아니라 제불 보살이 알고 있고 사용하고 있고 항상 머물러 있는 그 공양으로 공양을 올려요. 범부의 물질로 공양을 올리는 게 아니라 불보살의 물질로 공양을 올리는 겁니다. 加持供養 가지공양香羞羅列 施主虔誠 欲求供養之周圓 향수나열 시주건성 욕구공양지주원須仗加持之變化 仰惟三寶特賜加持 수장가지지변화 앙유삼보특사가지南無十方佛 南無十方法 南無十方僧나무시방불 나무시방법 나무시방승 그래서 이 범부의 물질이 불보살의 물질로 변하게 하는 것을 가지(加持)라고 그러는데요. 더할 가자, 간직할 지자, 가지는 가피를 간직한다 이 소리예요. 가피를 간직한다. 가피 소지, 가피를 간직하는 바다. 그러면 그냥 꽃이 범부가 보는 꽃이 아니고, 불보살이 쓰고 있는 그 꽃으로 올리고, 향이 그냥 범부가 일상적으로 아는 향이 아니라 불보살이 항상 쓰고 있는 향을 올린다. 그러면 불보살 물질은 뭐고 일체 범부의 물질은 뭐냐. 불보살의 물질은 진여 물질이에요. 진여(眞如), 생멸없는 진여법. 그런데 범부가 보고 쓰는 물질은 생멸 물질이에요. 생기면 사라지고, 생기면 사라지고 하는 생멸 물질이에요. 그러면 불보살은 일체법이 다 생멸 없는 진여법이고요, 일체법이 모두 광명법이에요, 어두움은 없고 항상 광명만 있는. 그리고 일체법이 모두 신통법이에요. 신통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세계가 움직인다. 이게 신통이거든요. 또 일체법이 다 자비법이에요. 분노와 그런 악행이 없고, 항상 지혜로 자비의 느낌을 받는 그런 자비법인데 ,공양을 올리는 공양물이 이렇게 진여물, 광명물, 신통물, 자비물로 변하게 변화를 시켜서 공양을 올린다, 이게 헌공 작법이거든요. 그러면 그 작법 의식을 보면 향수가, 향과 물질이, 나열(香羞羅列)은, 불단에 진열을 해서 차려져 있는 것은 시주건성(施主虔誠)이라, 시주한 분들의 지극한 정성이다. 이거는 요즘은 재자, 재자가 내는 시주거든요. 재자건성(齋者虔誠)이다. 건자는 정성 건자에요. 성자나 같은 말이에요. 욕구공양지주원(欲求供養之周圓)이면, 이 공양이 두루하고 원만해서 모자람이 하나도 없도록 구하고자 한다면, 그런 공양이 되도록 이루고자 한다면, 수장가지지변화(須仗加持之變化)라, 모름지기 가지 변화를 힘입어야 한다. 불보살님의 가지 신통으로 소지하는 그런 변화를 힘입어서 가지공양을 올려야만이 공양이 두루하고 원만하다 그런 말이죠. 그래서 앙유(仰惟)하느니, 우러러 비옵나니, 원하옵나니, 삼보(三寶)께서는, 불법승 삼보께서는 특사가지(特賜加持)하소서, 특별히 가지 신통력을 베풀어 주십시오. 이렇게 작법을 해서 공양을 올려요. 그래 가지고 다시 한번 나무상주시방불 나무상주시방법 나무상주시방승(南無十方佛 南無十方法 南無十方僧). 이렇게 소청 거목(擧目)을 하고, 그 명목을 부른다 이 말이죠. 들 거자는 부를 거자와 같은 말이니까. 願此香 爲解脫知見 願此燈 爲般若智光 원차향 위해탈지견 원차등 위반야지광願此水 爲甘露醍醐 願此食 爲法喜禪悦 원차수 위감로제호 원차식 위법희선열 卽世諦之莊嚴 成妙法之供養 以此香羞 特伸供養 즉세제지장엄 성묘법지공양 이차향수 특신공양 그다음에 일상 의식문에는 없는데, 그러면 어떻게 어떻게 이 일반 사용물이 이 불보살 진여물이 되냐. 어떻게 하면 우리가 늘 쓰는 것이 진여 광명의 물질이 되느냐. 이걸 옛날 의식문에서는 그대로 기록했는데, 의식문이 조선시대 이후로 전해지는 게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진언권공(眞言勸供)이라고 하는 책이 있어요. 이 진언권공이라는 책은 학조(學祖)라고 하는 큰 스님께서 그 당시 훈민정음 요즘 한글로 공양 의식문을 번역을 한 책이에요. 간행된 연도는 1496년 연산군 2년인데, 그 당시 연산군의 할머니 인수대비가 원을 세워서 학조스님에게 당부를 해서 진언권공이라고 하는 책을 간행을 했습니다. 근데 그 간행문이 얼마나 좋은지, 그 당시 번역을 해서 그 당시 말 연구하는 데도 굉장히 중요한 책이고, 조선조 1400년대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이 공양 의식 작법을 봉행을 했느냐 알 수 있는 면에서도 아주 중요한 그런 책이에요. 그런데 거기 보면, 원하옵니다, 원(願). 차향(此香)이, 부처님께 올리는 이 향이 위해탈지견(爲解脫知見)하소서. 해탈지견이 되게 하소서. 해탈이 있고 해탈지견이 있는데, 해탈은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는 게 해탈이고요, 지견은 그 해탈에서 알고 보는 지혜광명이거든요. 그러면 이 향은 해탈지견향이 되기를 원하옵니다. 원차향 위해탈지견향. 그다음에는 원차등 위반야지광(願此燈 爲般若智光), 이 등이 반야지혜광명등이 되게 하소서. 원자는 하십시오, 해 주십시오. 이 등이 반야지혜광명등이 되게 해주십시오. 원하옵나니, 이 등이 반야지혜광명등이 되기를 원하옵니다. 이런 거죠. 그다음에 원차수(願此水)가, 부처님께 올리는 이 청정수 물이 위감로제호(爲甘露醍醐)하소서. 감로제호라고 하는 것은, 우유에서 나와서 아주 잘 정제해서 최고로 좋게 만든 걸 제호라고 하는데, 감로는 그야말로 감로죠, 단이슬, 물맛 중에 최고의 물맛을 감로라고 그러는데 이거는 부처님의 생사 없는 열반을 뜻하는 거죠. 열반. 제호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이 물이 열반에서 느끼는 감로제호가 되기를 원하옵니다. 원차식(願此食)이, 이 밥이, 이 음식이 위법희선열(爲法喜禪悦)하십시오. 법희, 법의 즐거움, 선열, 선정의 희열, 법의 즐거움과 선정의 희열이 되는 법희선열이 되기를 원하옵니다. 즉세제지장엄(卽世諦之莊嚴)으로, 곧 세제장엄이라, 세제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보는 향이나 등불이나 물이나 밥이나 이런 것들을 꾸며 놨는데 이런 것으로 성묘법지공양(成妙法之供養) 하나이다. 묘법, 부처님의 해탈, 부처님의 열반, 부처님의 성불, 거기에서 느끼는 공양이 되어서, 묘법지 공양이 공양이 이루어져서 이차향수(以此香羞)로, 이렇게 묘법으로 이루어진 향과 물질로 특신공양(特伸供養)하나이다. 특별히 공양을 펼칩니다. 공양을 올립니다. 그래서 헌공작법에는 가지공양작법이 있어요. 가지공양이라, 가피로 간직하는 공양이다, 이 말이죠. 그냥 우리가 생멸법으로 보는 공양이 아니라 진여법으로 보는 공양이다. 부처님은 늘 진여 극락세계 속에 사는데, 우리는 의식 분별로, 무명 업식으로, 사바세계, 생멸세계, 생멸사바세계에 산다. 이 생멸사바세계에 있는 범부 중생이 진여 극락세계에 항상 계시는 상주 시방 불법승에게 이렇게 공양을 올리면 바로 거기서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헌공작법 의식입니다. 그래서 이 공양의 서원은 맨 마지막에 축원작법에 그대로 다 이루어지거든요. 마지막 헌공작법이 축원작법인데 그 축원의 글자에 염원, 일체 중생의 서원, 일체 보살들의 그런 광대 행원이 축원에 모두 담겨 있어요. 근데 이제 여기까지가 가지 공양, 우리가 공양을 올릴 때 부처님의 가피를 간직해서 올린다. 그래서 이 헌공작법에는 가지작법이 있어요. 그래서 그 가지를 변식이라고 하는데 중생의 물질이 부처님의 물질로 변하게 하는 의식이다. 그래서 변식진언이라고 해서 다라니를 외우는 것은 그게 가지변식작법입니다. 六法供養讚香 향을 찬탄함 찬향曾祝萬年天子壽 일찍이 천자의 만년 수를 빌었고 증축만년천자수重成五分法王身 오분의 법왕신을 거듭 이뤘도다. 중성오분법왕신旃檀林裏占都魁 전단향 숲에서 으뜸이 되고 전단임리점도괴蘭麝叢中居上品 난사향 중에서도 상품에 있도다. 난사총중거상품 讚燈 등을 찬탄함 찬등一點八風吹不動 명등은 팔풍에 움직이지 않고일점팔풍치부동寸心萬劫鎭長明 마음은 만겁에 항상 길이 밝도다.촌심만거진장명 西天佛祖遞相傳 서천의 불조가 서로 이어 전하니 서천불조체상전大地衆生消黑暗 대지 중생이 어둠을 밝히도다.대지중생소흑암(眞言勸供, 學祖譯, 1496년 간행)(진언권공, 학조역, 1496년 간행) 그다음에 그러면 이 가지 공양을 하는데, 이 가지 공양의 내용은 어떤 거냐. 그러면 이걸 육법공양(六法供養)이라고, 육법으로 변화를 시켜서 공양을 올린다. 여섯 가지 내용이 여섯 가지 법으로 변화가 된 그런 공양이다, 이런 말인데요. 그래서 가지 공양, 육법 공양, 가지변식작법, 또 육법낱낱찬법, 그것이 공양하는 작법의 내용인데요. 육법이라고 하는 것은 향등(香燈), 첫째는 향으로 올리는 법, 향법. 등, 등이라면 옛날에는 초를 등 안에다가 많이 밝혔기 때문에 등이라고 그러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초지요, 초. 등불. 밝은 거 그래서 향등. 화과(花果), 꽃 화, 과, 과일, 다미(茶米), 차 다자, 미인데 미는 쌀 미자를 써서 쌀로 올리는 공양을 미라고도 하고, 맛이라고 하는 맛 미 자를 써서 나물이라든지 이런 맛이 들어가는 진수를 미라고도 하는데 그거 다 포함될 수 있어요. 그래서 향등다과화미, 향과 초와 꽃과 과일과 차와 백미 진수 이런 거를 모두 이제 육법이라고 하는데요. 향을 올릴 때 어떤 향으로 변화된 향을 올리느냐. 이게 가지공양법인데요. 향에 대한 찬법을 하나 보면, 찬향(讚香)이라, 향을 찬탄한다. 얼마나 이게 게송이 좋은지. 증축만년천자수(曾祝萬年天子壽)하고, 중성오분법왕신(重成五分法王身)이라. 이 향 하나를 피우면 일찍이 천자, 이 세상에 가장 존귀한 사람, 천자의 만년 수명을 빌 때도 이 향을 썼고, 또 향은 오분진향이라, 다섯 가지 해탈의 참된 향이라. 그래서 오분 진향을 가지고 법왕신을 거듭 이루었다. 법왕신은 부처님 몸을 말하고,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이게 오분향인데, 향이 이런 다섯 가지 법신향이고, 이 법신향을 올림으로 말미암아 일체 부처님이 성불도 했고 일체 천자들이 수명을 빌었다. 이렇게 향을 찬탄해요. 그래서 이 향은 전단임리에 점도괴(旃檀林裏占都魁)하고, 전단은 향인데, 일체 세간에 있는 모든 수풀 속에서 도괴라, 도무지 괴자, 높을 괴자, 세간에 있는 모든 향나무 향, 풀나무 향 풀향, 나무 향, 이런 모든 향 중에서 지금 올리는 이 해탈향이 전체에서 높은 데를 점령하고 있고, 점자는 높은 데 앉아 있다, 머물러 있다, 이거지요. 지금 올리는 이 해탈향이 전단 향나무 흙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 속에서도 가장 높은데 점령해 있고, 난사총중의 거상품(蘭麝叢中居上品)이라, 향에는 또 난에서 나는 난향이 있고, 사향노루에서 나는 사향이 있는데, 이 난향 사향 여러 무리 가운데, -떨기 총자인데,- 향이 그냥 난꽃향 노루향 이런 온갖 종류 가운데에서 상품에 머물러 있다. 이 말은 이 해탈향은 세간의 어떤 향도 전단향이나 난사향으로 비교할 수가 없고 항상 향기롭고 빛나는 향이다. 이런 말씀이거든요. 그래서 이건 뭐냐. 부처님의 향은 진여 법신향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향으로도 비교할 수가 없다, 이 말이죠. 이렇게 향을 찬탄을 해서 공양을 올려요. 그다음에 찬등(讚燈)이라, 등을 찬탄한다. 일점은 팔풍이 치부동(一點八風吹不動)하고, 등을 일점이라고 하는데요. 왜 일점이라고 그러냐. 등불을 보면 다른 데는 다 어두운데 그 등불에 있는 불만 홀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기 때문에 그걸 한 점이다. 그래서 일 점이라고 그래요. 일점의 한 등불은 팔풍이 불어도, 팔풍은 뭐 온갖 괴롭고 슬프고 한 이런 거, 여덟 가지 바람이라고 그러는데, 팔풍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는다, 늘 밝아 있다, 이거지. 또 촌심은, 촌심은 마음인데, 중국 사람들은 마음이 심장에 있다고 생각을 해서, 심장이 이게 뭐 크지를 않고 크기가 촌, 길이를 재는 단위를 촌이라는 게 있거든요. 몇촌 몇촌 하는 거. 그래서 촌심, 조그마한 심장에 있다. 그 심장에 머물러 있는 마음이다. 그런데 촌심, 이거 자체를 진여 광명심,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일촌 밖에 안 되는 이 심장이 보이지 않듯이, 진여 광명 해탈 열반의 광명은 안 보인다. 심장이 보이지 않듯이 늘 마음을 드러내듯이, 이 진여 광명도 범부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항상 밝아 있는 그게 마음이다. 그래서 그런 촌심은 만겁이 돼도 억만년 세월이 흘러도 진장명(寸心萬劫鎭長明)이로다. 진자는 이게 진칠 진자인데, 다른 뜻으로 항상 진자가 있어요. 항상. 진상수라, 항상 따른다. 이 마음은 만겁이 되어도 항상 길이 길이 있는다. 그러면 일점도 등을 말하고 촌심도 등을 말하는데 이건 지혜광명이 그렇다 이 말이죠. 지혜광명 일점등 지혜광명 촌심등. 그래서 부처님께 올리는 이 촛불은 그냥 켰다가 꺼지는 촛불이 아니라, 이렇게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등불, 이렇게 만 겁에 항상 밝은 등불인데, 이 등불을 올린다 그 말이에요. 근데 그 등불이 뭘 했냐. 천불조가 체상전(西天佛祖遞相傳)하시고, 인도에서 부처님 조사가 항상 서로 서로 전하시고, 대지중생이 소흑암(大地衆生消黑暗)이라, 온 대지의 중생들이 어두움을 싹 밝혔다. 여기 물리칠 소자인데 어두움을 물리친다고 하는 것은 광명을 뜻해요. 어두움을 어떻게 물리치느냐. 밝은 빛을 켜면 어두움은 오간 데가 없어요. 그래서 여기서 소자는 어두움을 물리쳤다. 이 말이 다른 말이 아니라 광명을 밝혔다. 대지 중생이 이 등불 하나로 어둠이 다 밝아졌다. 이렇게 찬탄을 해서, 세간의 물질이 부처님의 물질로 변화가 되고 그런 또 공양을 올리는 중생들이 다 성불을 하고 서원을 이루는 그런 내용이 공양을 올리는 작법이고 공양을 올리는 행위입니다.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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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기도]12월 22일 동지기도 회향 법문
종범스님 2021-12-22
안녕하십니까. 오늘 신축년 동지일, 진관사 동지 법문입니다. 동지는 불교가 동아시아에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동지는 이 동아시아인들의 우주관을 뜻하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이 천지 우주 기운을 이해할 때 <천지는 음양이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음양. 그래서 음양은 기운인데, 천기에는 음기와 양기가 있다. 그래서 양의 기운은 동지서부터 하지 때까지고, 음의 기운은 하지서부터 동지 때까지다. 이렇게 파악을 하고, 이 천지 음양의 기운이 자꾸 순환을 하는데, 그 순환하는 그 부분을 이십사절기(節氣)라고 해서 기운이 마디마디 바뀐다는 거죠. 마디 절자, 기운 기자, 절기. 이것이 이 동아시아인들의 우주 음양 순환적 우주관입니다. 그런데 불교가 동아시아에 들어와서 그 행사를 할 적에 옛날서부터 기념하고 경축하던 날짜에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그 동지 음양의 우주관에 의한 명절날에 불교 법회를 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 동지에 있던 풍속을 보면 민족에 따라서 동지를 엄청난 축제로 생각하고, 경축을 하고, 또 복을 빌고 감사를 표하고 그런 게 있어요. 그리고 이 동양인들은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길이냐’라고 하는 거를 파악을 할 때, 이 천지 음양 하늘의 기운을 거역하면 안 된다, 그걸 거역하는 것을 역천이라고, 그래서 천지 기운을 거역하면 그것이 역천인데, 하늘을 거역하는 것인데 그거는 망한다고 했어요. 역천자는 망이라(逆天者亡). 그러면 어떡하는 게 잘 사는 거냐. 순천(順天)을 해야 된다. 천지 음양의 기운에 순응해야 된다 이거죠. 순응해야 된다. 그래서 공자께서 노병에 누워 계시는데, 제자가 가서 “선생님 좀 오래 사시라고 기도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니까 공자가 뭐라고 그랬느냐면 “획죄어천(獲罪於天)이면, 하늘에 죄를 얻으면, 무소도라(無所禱也), 기도할 곳은 없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하늘의 죄를 얻으면 빌 곳은 없다. 이게 공자의 우주관이에요. 그래서 하늘에 순응해야지 하늘 기운 밖에 어디 가서 빌어서 될 일은 아니다. 이것이 순천이죠. 陰陽相生 節氣循環 壽福康寧 禦寒辟暑 음양상생 절기순환 수복강령 어한벽서冬則溫之 以禦其寒 夏則凉之 以辟其暑동즉온지 이어기한 하즉량지 이벽기서 그러면 일상생활에서 순천의 생활이라는 게 어떤 거냐. 음양이 상생하고(陰陽相生), 음과 양이 서로서로 생기고, 절기가 순환하니(節氣循環), 절기가 돌고 도니, 수복강령(壽福康寧)을 하기 위해서는, 수명과 복덕,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한벽서(禦寒辟暑)라, 어한이라고 하는 것은 추위를 막는다. 이 동기 때는 추우니까 추위는 잘 막아서 따뜻하게 하고, 벽서라고 하는 건 물리칠 벽자인데, 더울 서자, 더위는 잘 물리쳐서 몸을 건강하게 보호해야 된다. 이게 순천이에요. 그래서 순천을 하는 것은 안분(安分)이다. 편안할 안자, 분수 분자. 분수에 편안하게 사는 것이 그게 역천을 하지 않고 천기 순환에 순응하는 길이다. 이런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추울 때는 추위를 잘 막아서 따뜻하게 하고 더울 때는 더위를 잘 물리쳐서 서늘하게 해서 그 음양의 기운에 잘 순응해서 뭘 얻느냐. 수복과 강령을 얻고, 수명 복덕 건강을 얻고, 자손 창성을 얻고, 자손이 대대로 창성하고, 또 부귀 영화를 얻는다. 이것이 불교 이전부터 있었던 동양인들의 우주관이에요. 그래서 이 동양인들은 순천, 안분, 하늘의 기운에 순응에서 자기 분수의 편안함을 갖는 것이 행복한 길이다. 편안할 안자, 분수 분자. 안분이라는 건 뭐냐. 군군신신부부자자라(君君, 臣臣, 父父, 子子). 군주는 군주답게 행동을 하고, 신하는 신하답게 행동을 하고, 부모는 부모답게 하고, 자식은 자식답게 하고 그러면 행복하다는 거예요. 이게 순천 안분 교육이고 사상이에요. 諸法從因生 諸法從因滅 제법종인생 제법종인멸如是滅與生 沙門說如是여시멸여생 사문설여시(佛本行集經불본행집경제48권) 緣起法 연기법因緣法 : 因親緣疎 諸法生成 인연법 : 인친연소 제법생성因果法 : 業因受報 三世相續인과법 : 업인수보 삼세상속 근데 불교는 하늘에 순응하는 게 아니에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건 인연법(因緣法)을 깨달았어요. 인연법. 불교가 처음으로 깨닫고 처음으로 가르친 그 진리가 인연법이에요. 인연법이라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이것과 저것이 만나는 데서 이루어진다. 하늘이 인간을 지배하는 게 아니고, 다른 것이 인간을 지배하는 게 아니고,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인연에 의해서 발전된다. 이걸 가르친 게 석가모니 부처님이에요. 그래서 이제 인연법은 연기법이라고 그러는데,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게 연기법(緣起法)이죠. 얼마 전에 누구하고 대화를 하는데, 질문을 하기를 “도인이 뭡니까?” 이렇게 물어요. “도인이 뭡니까.” 그래서 “연기법을 아는 것이 도인이다.” 그랬더니 “그러면 연기법하고 인연법하고 인과법하고는 어떻게 다릅니까?” 이렇게 물어요. 그래서 ‘그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생각을 했어요. 연기법(緣起法)이 기본 개념이고, 전체 뜻인데 연기법이라고 하면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하는 법이니까 가장 통합적이고 원론적으로 표현한 게 연기법이에요. 그런데 이 연기법은 인연법(因緣法), 인과법(因果法)이 있는데, 인연법은 뭐냐.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인이 있고 연이 있어요. 그러면 인은 뭐냐. 인은 가까운 거고 친한 걸 인이라 그래요. 연은 조금 떨어진 걸 연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한자문화권에서는 인연을 가르칠 때 인친연소(因親緣疎)라, 인은 친하고 연은 떨어질 소자가 있는데, 연은 조금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인친연소를 인연이라고 그러는데, 이게 도대체 뭘 말하는 거냐. 인은 종자와 같고, 연은 흙과 물과 공기와 같다, 이렇게 가르쳐요. 그래서 종자가 인이 돼서 흙을 만나고, 물을 만나고, 공기를 만나면,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서 이루어진다. 이걸 제법생성(諸法生成)이라 그럽니다. 제법이 생성, 모든 법이 나서 이루어진다. 인연이라고 그러면 모든 것 전체를 종자와 환경이 만나서 이루어지듯이 설명하는 구조가 인연이고요, 인과라 그러면 전체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개별개별, 개별개별이 하나하나가 업인수보(業因受報)라, 업의 원인으로 받을 수, 보답 보, 보답을 받아서 삼세상속(三世相續)이라, 과거 현재 미래에 계속 서로서로 이어가는 걸 설명할 때 인과라 그래요. 그래서 인과는 삼세인과고, 인연은 제법 인연이다. 제법 전체를 말할 때는 인연이라 그러고, 하나하나가 과거 현재 미래 원인과 결과가 이어지는 걸 말할 때는 인과라고 한다 이거죠. 그래서 하나하나 설명할 때는 인과고, 전체로 말할 때는 인연이고, 인과 인연을 합쳐서 말할 때는 연기다. 그러면 이게 뭐냐. 불교는 자기가 인업을 형성하면, 원인의 업, 그럼 과보를 받아요. 인업수보. 우리가 나의 행복이 하늘에서 온다든지 땅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가 좋은 원인의 행위를 하면 그 행위가 업인데, 그 원인 행위에 의해서 좋은 결과를 받으니까 나의 행복을 내가 만들어가는 거예요. 나의 행복을. 그래서 불교는 정견(正見)과 해탈이에요. 정견, 바를 정자, 볼 견자. 정견은 뭐냐. 그 인연, 인과, 연기법을 바르게 보는 걸 정견이라고 해요. 인연법을 바르게 본다, 인과법을 바르게 본다, 연기법을 바르게 보는 게 그게 정견이에요. 그래서 뭐 하자는 거냐. 해탈하자는 거예요. 해탈은 고통해탈, 고통으로 부터 벗어난다, 생사해탈, 생사로부터 벗어난다. 법계해탈, 법계는 우주인데 우주에서부터 벗어나는 게 그게 법계연기, 법계해탈이에요. 그래서 생사로부터 벗어나는 거는 오온 인연을 보는 거죠. 이 몸이 어떻게 이루어졌냐. 반야심경에 있는 그대로 몸이라고 하는 것은 색수상행식 다섯 가지 인연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을 자세히 보면 인연은 공한 것이다. 공이라는 건 뭐냐. 인연으로 난 것은 난 게 아니다, 이거죠. 이게 뭔 소리냐. 물이 찬 공기를 만나면 얼음이 생겼는데, 그 얼음 자체는 그대로 물이지 다른 게 없다는 거예요. 이걸 자성이 없다고 그래요. 그냥 얼음도 물뿐이지, 찬 거 만나면 얼음되는 것뿐이지, 물이 달라진 건 없다. 그래서 불생이라는 거죠. 불생. 난 것이 없다는 거죠. 그다음에 따뜻해지면 얼음이 물 되는데 얼음이 없어지고 물이 됐다고 그래도 없어진 건 없다. 불멸이라는 거죠. 그래서 이 오온 인연을 바로 딱 관찰을 하면 해탈해요. 해탈. 이 선근공덕 인연, 착한 종자, 공덕 종자를 자꾸 쌓으면 장애에서부터 해탈을 해요. 장애라고 하는 것은 신장, 몸의 장애, 몸이 병이 있다든지, 인장, 사람의 장애, 사람으로부터 고통을 당한다든지, 또 물장, 재물로부터 고통을 당한다든지, 이런 장애가 심해지고 심해지면 그걸 삼악도라고 그러는데, 이 선근공덕을 자꾸 지으면 삼악도에서 벗어나게 되고요. 오온 정견을 자꾸 닦으면 오온을, 우리 몸을 바로 보는 그 수행을 자꾸 하면 몸이 불생불멸이라는 걸 알게 돼요. 그래서 오온은 개공(五蘊皆空)이니, 오온은 다 공이니 공상은 불생불멸이다. 공의 진실상은 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다. 이게 오온 정견 생사해탈, 오온을 딱 바로 보면 생사에서 벗어나게 된다. 선근공덕을 많이 닦으면 고통장애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이 인연법을 자기 한 사람만 보면 오온 정견인데, 우주 전체를 보면 이건 법계 정견이 되는 거예요. 법계 정견. 이 법계라는 거는 하나에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모든 것이 하나에 들어가는데, 이 하나와 모든 것이 원융무애(圓融無礙)해요. 원만히 다 통하고 서로서로 장벽이 없고 장애가 없어요. 이게 법계 연기에요. 그래서 이 법계 연기 실상을 깊이 보면 이게 법계관법인데, 이 법계관법으로 들어가고 들어가면 원융무애가 되는 거예요. 원융무애라는 건 뭐냐. 이 하나하나에 자체 성격이 없는 연기법이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다 통해요. 이게 원융이예요. 그리고 무애라는 것은 사물 하나하나가 자체 성격이 없기 때문에, 나무가 불에 들어가도 걸림이 없고 불이 나무에게 들어가도 걸림이 없고, 흙이 물에 들어가도 걸림이 없고, 물이 흙에 들어가도 걸림이 없고. 이 걸림 없이 융통한 법계 연기 실상을 어려운 말로 사사무애(事事無礙)라 그래요. 사사무애. 일 사자, 일 사자는 물건이라는 말인데 물건 물건이 전혀 걸림이 없다. 하나하나 성격 성격이 전부 원만하게 융통한다. 이렇게 법성원융 사사무애 법계 연기 실상을 깊이 보면 법계가 없어요. 오직 마음이 나타난 거예요. 법계는 무법이오 유심소현(唯心所現)이라. 오직 마음이 나타난 거다. 이게 법계 정견, 법계 해탈이에요. 불교는 이걸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선근공덕으로 고통 장애에서 해탈을 하고, 오온 정견으로 오온을 바로 보는 것으로 생사윤회에서 해탈을 하고, 법계의 실상을 바로 보는 것으로 법계에서 해탈을 한다.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럽니다. 깨달음. 그럼 뭐 하자는 거냐, 깨달음이. 행복해요. 어떤 장애가 없을 때 행복해요. 그걸 딱 깨닫고 보면 장애는 내가 만든 거예요. 근데 깨닫기 전에는 내가 장애를 만들었다는 걸 몰라요. 그래서 이제 깨닫고 보니까 원래 장애가 없었는데 ‘내가 장애를 만들어서 괴로워했구나.’ 이거를 알게 돼요. 이게 불교예요. 如依所數物 而有於能數 彼性無所有 如是了知法 여의소수물 이유어능수 피성무소유 여시료지법譬如算數法 增一至無量 數法無體性 智慧故差別 비여산수법 증일지무량 수법무체성 지혜고차별(華嚴經夜摩偈品, 精進林菩薩頌) (화엄경야마게품, 정진림보살송)由能數智 作百千解 一多相待 故無體性 유능수지 작백천해 일다상대 고무체성喻彼妄想 於無性中 計爲有無(清凉疏)유피망상 어무성중 계위유무(청량소) 그래서 이 연기법을 설명하는데, 불생불멸 공으로도 설명을 하고, 화엄경에서는 여러 가지 설명 방법이 있는데, 첫째가 산수법으로 설명해요. 연기법으로 산수법. 산수(算數)라는 건 뭐냐. 계산할 산자, 숫자라는 수자, 경상도 말로 시알린다고 그러는데, 수를 세는 게 산수인데, 산수가 참 묘해요. 인도인들은 이걸 느꼈어요. 이 수라는 게 아무 실상이 없는데, 고정 성격이 없는데, 또 수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이 산수 비유를 가지고 연기법을 설명하는데 산수 비유가 뭐냐. 첫째 산수는 하나에서부터 출발하거든요. 하나. 그다음에 둘이에요. 보통 열까지를 만수라고 그러는데, 본수, 만수. 끝나는 숫자가 만수고, 시작하는 숫자가 본수에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열이면 또 그다음에 열이 되고 열이 되고 해서 이제 한없이 펼쳐 나갈 수 있죠. 그런데 이 하나라는 게 말이에요, 이게 정해진 게 없어요. 누구든지 ‘이게 하나다’라고 마음 먹는 대로 하나가 되는 거예요. 이게 찻잔을 하나 떡 들고 ‘이게 한 개다’라고 내가 인정하면 이게 한 개지, 이게 정해진 게 아니에요. 여기서 하나라는 숫자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숫자가 정말로 자체가 없이 그냥 펼쳐지는 거거든요. 그럼 둘이라는 거는 하나가 있을 때 둘이 돼요. 하나 없으면 둘 안 돼요. 또 셋이라는 것도 하나, 둘이 있을 때 셋이 돼요. 하나, 둘 없는 셋은 없어요. 이게 연기법이라는 거죠. 넷도 하나, 둘, 셋이 있을 때 넷이 되고요. 다섯도 하나, 둘, 셋, 넷 있을 때 다섯이 된단 말이에요. 이런 식으로 아홉이 있을 때 열이 되는 거지, 아홉 없는 열은 없어요. 그래서 아홉의 인연으로 열이 생겼다. 그러면 열 속에는 열이 자체적으로 열이라는 게 있는 게 아니에요. 열 속에는 아홉이 있고, 여덟이 있고, 일곱이 있고, 이런 식으로 하나가 있을 때 열이 있는 거란 말이지요. 그래서 열이라는 것은 하나하나에 의해서 열이 있고 또 열이 있을 때 하나하나가 있다. 묘한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인도에서는 수를 철학적으로 이해하게 됐어요. 이걸 수학적으로는 다르게, 이게 이렇게 딱 달라요. 그래서 이 하나로 보면 둘이 됐을 때도 하나는 그대로 있는 거예요. 셋이 됐을 때도 하나는 그대로 있고, 넷이 됐을 때도 그대로 하나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 하나가 백하고 만나면 이게 백 하나가 되고요. 똑같은 하나인데, 천하고 만나면 천 하나가 되고요. 만하고 만나면 만 하나가 돼요. 그런데 하나는 그냥 하나인 거예요. 이래서 모든 건 인연법인데 인연법이 만나는 대로 다 이루어진다. 이게 산수로서 인연을 설명한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는 건 이 하나라는 게 손가락을 가지고 말을 하더라도 이게 그냥 몸인데 손가락 하나 인정하면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또 이 손가락을 셀 때 어디서부터 세냐. 엄지손가락부터 세면 엄지손가락이 1번이 되는 거고요. 새끼손가락부터 세면 새끼손가락이 1번이 되는 거예요. 중간서부터 세면 중간이 1번이 되는 거에요. 이거 뭐냐. 첫째, 둘째가 없다는 거예요. 정하는 대로 첫째가 된다는 거죠. 엄지를 1번으로 정하면 엄지가 1번이고, 중간 걸 1번으로 정하면 중간 게 1번이고, 마지막 걸 1번으로 정하면 마지막 게 1번이라. 그리고 또 이게 정하더라도 사람에 따라서 왼쪽으로 돌 수가 있고, 오른쪽으로 돌 수가 있는데, 이게 새끼손가락을 1번으로 하면 이 무명지가 2번이 되고요, 장지가 3번이 되고, 그다음에 식지가 4번 되고, 이게 엄지가 5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엄지를 1번으로 정하는 사람 만나면 이 엄지가 1번 되고요. 이렇게 돼서 인연이라는 거는 만나는 대로 이루어지는 거지, 정해진 게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이 수량법으로 뭘 가르치냐 그러면은, 연무자성(緣無自性)이라, 인연에는 자체 본성이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행복과 불행도 자체 본성이 없는 거예요. 내가 만드는 거예요. 나의 고통도 내가 만들고, 나의 행복도 내가 만들고, 나의 생사도 내가 만들고, 나의 해탈도 내가 만들고, 우주도 내가 만드는 거예요. 유심소현이라, 오직 마음이 나타난 거다. 諸惡莫作 諸善奉行 제악막작 제선봉행自淨其意 是諸佛教자정기의 시제불교(法句經下 述佛品)(법구경하 술불품) 善根功德 人天受福 선근공덕 인천수복自净其意 生死解脫자정기의 생사해탈 이렇게 돼서 선근공덕(善根功德)을 자꾸 쌓으면 그 인연으로 인천수복(人天受福)한다고 가르쳐요. 태어날 때마다 인간 세상과 인간 세상보다 더 복된 천상 세상에서 복을 받고 또 자정기심(自淨其心)하면 마음을 스스로 맑혀서 온 신상을 관찰하면, 이 색수상행식 오온으로 된 몸의 진실상을 잘 관찰을 하면, 몸이 불생불멸이고 반야가 부증불감이라. 그래서 이 불생불멸 부증불감 피안경계, 이 생노병사 차안경계가 아니라 불생불멸 부증불감의 저쪽 경계 피안 경계에 가는데 그걸 생사 해탈이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리고 우주 전체를 관찰을 하면 이게 법계관인데 법계의 관법이 깊어지면 법성원융 사사무애를 깨달아서 일체우주현상이 유심소현이라는 걸 알고, 오직 마음이 나타난 걸 알고, 이걸 신통자제라고 그래요. 신통 자재의 경지에 들어간다. 신통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신통이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보는 대로 보인다. 이게 법계 해탈이에요. 수수즉수라, 따를 수, 요구할 수, 요구하는 데 따라서, 즉수, 곧 거둔다. 곧 즉, 거둘 수. 이게 신통자재입니다. 법계 해탈 신통자재. 그러니까 이 동짓날 동지의 전통은 하늘의 기운을 잘 받들어서 행복한 그런 전통이지만, 불교에서 동지를 맞이하는 것은 이 정견 해탈로 인연법을 바로 봐서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탈하는 이런 염원과 행위로 법회를 하는 거거든요. 오늘 날씨가 추운데 마당에 앉아서 법문을 들으니 얼마나 추위가 심하시겠어요. 그래도 이 정견 해탈 법문을 통해서 우리가 더 좋은 복덕을 누리고 또 해탈을 이루면 그게 오늘 동지법회를 봉행하는 참뜻입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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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음력 11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1-12-04
오늘 신축년 동짓달 초하루 진관사 법문은 예경공덕, 예경공덕, 이런 제목입니다. 예경은 예배 공경, 공경 예배, 이런 걸 합쳐서 부르는 용어고요. 거기에 따르는 결과, 성취 이런 거를 공덕이다. 그래서 예경 공덕이다. 普禮偈 보례게我今一身中 卽現無盡身 遍在諸佛前 一一無數禮아금일신중 즉현무진신 변재제불전 일일무수례 우리나라에서 간행한 불교 서적 중에 1935년 을해년에 발간한 석문의범(釋門儀範)이라고 있는데, 그 석문의범 전에 불자필람(佛子必覽)이라고 하는 작은 책이 나왔고요. 그 이전에는 목판본, 또 각자 써서 하는 필사본 이런 걸로 의식문을 썼는데, 1935년에 간행한 석문의범이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게 됐어요. 그래서 석문의범에 보면 이 게송을 보례게(普禮偈)라고, 넓을 보자, 예배할 례자, 보례게라. 보례게가 어떻게 되냐. 나의 지금 한 몸속에서, 아금일신중(我今一身中), 즉현무진신(卽現無盡身)하야, 바로 한량없는 몸을 나타내서, 변재제불전(遍在諸佛前)하야, 모든 부처님들 앞에 안 나타나는 데가 없이 두루 다 나타나 있어서, 일일무수례(一一無數禮)라, 하나하나 무량수로 예경하기를 원하옵니다, 이런 말이거든요. 보례진언도 그렇고, 천수경이나 이런 거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게 뭘 의미하느냐 하면, 한국불교의 구성과 운영을 보면, 구성은 법화경으로 돼 있어요. 불탑이나 불상을 모시는데 전부 영산회상도, 또 팔부신장, 이런 것이 다 법화경으로 가람 배치라든지 불상, 불탑을 배치를 해서 예경을 하는데, 형식은 그렇고, 예경하는 내용은 전부 화엄경이에요. 그래서 부처님 모실 때 형식은 법화경 형식으로 조성을 했는데, 점안은 화엄경으로 점안을 해요. 또 예불도 화엄경으로 하고. 그래서 석문의범에 보면 여러 가지 예불문이 나오는데 그게 전부 화엄경이에요, 전부가. 그래서 한국불교는 신앙 예경 의식은 화엄경이고, 가람, 불상봉안, 불탑안치, 이런 거는 전부 법화경이고, 수행은 다 무주상보시, 금강 선정, 금강경으로 해요. 그래서 한국불교의 근본은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이 세 가지 경전이 한국불교 중심 뜻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거거든요. 천수경 시작하기 전에 하는 이 보례게도 전부 이게 화엄경 뜻이에요. 일중일체(一中一切) 중중무진(重重無盡), 화엄이라는 것은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는 일체 속에 있고, 일체는 일체로 끝나는 게 아니라 또 전체 속에 있다. 그래서 일체와 하나가 또 하나와 전체가 전부 항상 있어요. 같이 있어요. 그래서 나의 한 몸 속에 무한한 몸이 나타나서, 또 무한 부처님 앞에 전부 다 참여를 해서, 한 분 한 분에게 무한한 예경을 하기를 원하옵니다. 그렇게 출발을 하거든요. 普禮三寶 禮敬發願 보례삼보 예경발원普禮十方無上尊 五智十身諸佛陀 보례시방무상존 오지십신제불타普禮十方離欲尊 五教三乘諸達磨보례시방이욕존 오교삼승제달마 普禮十方衆中尊 大乘小乘諸僧伽 보례시방중중존 대승소승제승가 唯願 無盡三寶 大慈大悲 受我頂禮 冥熏加被力 유원 무진삼보 대자대비 수아정례 명훈가피력 願共法界諸衆生 自他一時成佛道(釋門儀範)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석문의범) 그리고 어느 예경이든지 보례삼보(普禮三寶)라, 일례일불이 아니라 보례요 보례, 널리 예를 해요. 내용은 내내 어디나 삼보죠. 불법승 삼보. 그리고 예경발원(禮敬發願)을 해요. 예불한 다음에는 발원을 하는데, 예불문이 길든 짧든 그 구성 요소는 불법승 삼보인데, 석문의범에 그런 삼보 제목이 있어요. 보례(普禮), 보례는 널리 예경 올린다 이 뜻이에요. 어떻게 하느냐. 시방무상존(十方無上尊), 시방에 있는 무상의 존상은 오지십신(五智十身)인데, 다섯 가지 지혜, 10가지 몸, 이런 분들은 오지 십신의 모든 부처님이 계신데, 그 부처님을 한꺼번에 부를 때 제불타(諸佛陀)라 이렇게 말한다는 거죠. 그래서 시방무상존의 오지십신인 제불타에게 보례하오이다. 널리 예경을 올립니다. 이런 뜻이고요. 보례시방이욕존(普禮十方離欲尊), 시방의 모든 번뇌 욕구를 여의는 존귀한 불의 오교삼승(五教三乘), 오교 교리가 있고 삼승 교리가 있는데, 이런 모든 가르침을 제달마(諸達磨)라고 한다. 그래서 시방이욕존의 오교삼승인 모든 달마에게 보례합니다. 보례시방중중존(普禮十方衆中尊), 시방의 모든 대중 가운데 가장 높은 대승소승제승가(大乘小乘諸僧伽), 모든 승가의 여러분들에게 보례합니다. 이런 구조가 길고 짧은 내용만 있을 뿐이지 그 내용 자체는 똑같아요. 보례에요. 한국불교는 일승원교(一乘圓敎) 화엄경이기 때문에 원교는 모든 교리를 다 포함하면서 모든 교리의 내용들을 다 성취한다, 이게 원교거든요. 그래서 원교는 제교소류라, 모든 가르침이 원교에서, 소류(所流), 바 소자, 흐를 류자, 흘러나온 바다, 원교는 제교소목(所目)이라, 원교는 모든 가르침이 바 소자, 눈 목자, 돌아가는 바 목적지다. 소류라는 것은 흘러나온 근원이고 또 돌아가는 목적지다 이래가지고 화엄학에서 원교는 제교소류, 원교는 제교소목, 그래서 한마디로 화엄 원교는 제교의 소류 소목이다. 그렇게 화엄가에서 가르치고 있어요. 그게 이제 전부 보례라는 거죠. 보례. 다 화엄 원교에서 나온 것이 소류고 다 화엄 원교로 돌아가는 것이 소목이다, 이 말이죠. 목적지가 되고 근원지가 된다. 그리고 어떤 예경이든지 예경을 하면 예경발원이 있어요. 예경발원. 우리가 칠정례 예불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유원 무진삼보(唯願 無盡三寶), 여기 무진삼보예요. 이게 화엄 원교예요. 대자대비로 수아정례하시고(大慈大悲 受我頂禮), 가장 존경스러운 예를 정례라고 그러는데, 이마 정자, 나의 정례를 받으시고, 명훈가피력(冥熏加被力), 명훈이라는 건 현훈(顯薰)과 반대되는 말인데, 화엄경이 아닌 다른 데서는 현훈을 많이 강조해요. 신통으로 나타나시는 거, 광명으로 나타나시는 거. 근데 이제 화엄은 원융무애(圓融無礙)이기 때문에 나타나든 안 나타나든 항상 가피를 받는 것을 명훈이라고, 명자는 표시 없이 향을 피우면 향 연기가 쏘이듯이 그렇게 가피력을 주셔서,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이, 법계의 모든 중생들이,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나와 다른 이가 다 일시에 성불하기를 원, 원하옵니다. 이렇게 하고 있거든요. 이게 이제 화엄 예경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제 예경의 하나하나의 가르침을 많은 분에게 주는데, 제일 많이 이야기되는 것이 이구혜보살소문예불법경(離垢慧菩薩所問禮佛法經)이라. 이구혜보살이 묻고 부처님이 대답한 예불법을 이야기한 경전이 있는데, 이 경전을 제일 많이 이야기하고. 그다음에 많이 이야기되는 것이 보현행원품 십종행원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첫 번에 예경예불원이고, 칭찬여래원이고, 그 보현행원품이 그대로 예불법경이다, 이런 거죠. 근데 그 보현행원품 예경을 설명한 청량조사, 청량 화엄조사가 있고, 그 청량화엄조사가 행원품 소를 냈고, 또 규봉 종밀 화엄 조사가 그 행원품 소에다가 다시 해석을 붙여서 초를 냈는데, 이 규봉의 행원품 소를 해석한 초문이 얼마나 이게 자세하고 좋고 중요한지 행원품을 공부하려면 청량 소와 규봉 초를 떠나서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요한 게송의 저술이에요. 청량조사가 십종례를 얘기했는데, 여기서는 그 가운데서 삼종례만 메모를 했는데요. 가장 중요한 것 중에 공경례(恭敬禮), 실상례(實相禮), 무진례(無盡禮), 십종례 중에 이런 것들이 아주 중요하게 기억될 내용이에요. 공경례는 모든 교리에 다 해당되는 예경이에요. 대승시교든지 대승종교든지 초기불교든지 부파불교든지 화엄이든지 공경례는 아주 기본이에요. 공경례가 있고 실상례가 있어요. 형식 없는 예, 아무 형식이 없는데 그 예경이 있어요. 또 무진례가 있어요. 무진례, 끊임없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항상 하는 일에 내 속에 부처님이 예를 하고 내가 부처님께 예를 하고 이렇게 무진례가 있다. 恭敬禮 : 五輪著地 稱名讚歎 五輪作禮 爲斷五道 具足五眼 공경례 : 오륜착지 칭명찬탄 오륜작례 위단오도 구족오안①右膝著地 願得正覺 ②左膝著地 得安正覺 ③右手著地 證大菩提 우슬착지 원득정각 좌슬착지 득안정각 우수착지 증대보리④左手著地 令入正法 ⑤首頂著地 悉得成就 無見頂相 좌수착지 영입정법 수정착지 실득성취 무견정상(離垢慧菩薩所問禮佛法經) (이구혜보살소문예불법경) 이 공경례를 보면 공경례라는 게 뭐냐. 예불법경에 있는 말씀인데, 오륜착지(五輪著地)라, 첫째로 오륜이라는 거는 오체라고도 하고 오륜이라고도 하는데, 이유는, 바퀴 륜자인데, 사람 몸을 크게 구분해 보니까 5가지 바퀴가 있더라. 이게 이제 우슬륜, 좌슬륜, 우슬이라고 그러면 오른쪽 무릎 바퀴, 좌슬륜이라고 그러면 왼쪽 무릎 바퀴, 우수륜, 좌수련 또 오른손 무릎 팔꿈치, 왼손 무릎 팔꿈치, 그다음에 정수리 이마 이렇게 오륜을 땅에 붙인다. 이것이 몸으로 표현하는 공경이다 이거죠. 그리고는 칭명찬탄(稱名讚歎), 불보살님의 명칭을 부르고 찬탄을 하고 그런 칭명찬탄과 오륜착지로서 오륜으로 예를 하는 것은 뭘 하고자 하는 거냐. 중생이 미혹해서 생사를 거듭하는 광장을 육도라고도 하고, 육도를 약간 생략하면, 약간 압축하면 오도라고 그러는데,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를 줄여서 인천 아수라 이러면 5도가 돼요. 그게 내내 내용은 6도예요. 인도와 천도는 구분하면 6도고 인도와 천도를 합쳐서 부르면 5도다. 이게 이제 이 오도윤회를 끊고 중단하고(為斷五道), 구족오안(具足五眼)이라, 금강경에서 말하는 오안를 구족하기 위해서 오륜을 착지를 해서 예경을 올린다. 이를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오륜을, 이게 우리 말로 하면 오륜이라고 안 하고 요새는 다 오체투지라고 그러는데, 오체투지 예경을 올리는 것은 오도윤회를 중단하고 오안을 갖추기 위해서 오체투지 예경을 올린다. 이런 식으로 예불법경에서 가르치고 있어요. 첫 번째 우슬착지(右膝著地)라.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는 거는 왜냐. 원득정각(願得正覺)이라, 정각을 얻기 위해서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댄다. 좌슬착지(左膝著地)라, 왼쪽 무릎을 땅에 대는 것은 뭐냐. 득안정각(得安正覺)이라, 정각에 늘 편안히 머물기 위해서 왼쪽 무릎을 땅에 댄다. 그다음에 우수착지(右手著地)라, 오른손을 땅에 붙이는 것은 뭐냐. 증대보리(證大菩提), 대보리, 큰 깨달음을 증득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좌수착지(左手著地)라, 왼쪽 손을 땅에 대는 것은 영입전법(令入正法)이라, 일체중생이 다 정법에 들게 하기 위해서 왼손을 땅에 대는 것이다. 또 수정착지(首頂著地)라, 머리 정수리를 땅에 대는 것은 실득성취 무견정상(悉得成就 無見頂相)이라, 볼 수 없는 정수리 모양을 다 성취함을 얻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 무견정상이라는 것은 지혜가 아주 위 없이 무상 대지를 증득하면 그 무상대지혜의 끝나는 지점을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걸 부처님 정수리에다가 비유해서 부처님 정수리는 일체 중생이 보지 못한다 이렇게 가르치는 거죠. 그래서 볼 수 없는 정수리의 모양을 성취함을 얻기 위해서 머리 정수리를 땅에 대고 예배를 하는 것이다. 근데 이런 내용은 다 이구혜보살 소문, 묻는 바, 예불법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고. 實相禮 : 不住於法 常冥法界 常禮諸佛 云實相禮 실상례 : 부주어법 상명법계 상례제불 운실상례無盡禮 : 一微塵中 見一切諸佛 一一佛所 一一禮無盡무진례 : 일미진중 견일체제불 일일불소 일일례무진 (澄觀述 普賢行願品疏)(징관술 보현행원품소) 그다음에 여러 군데에서 가르치고 청량이 이야기하는 실상례라는 것은 실상이 뭐냐. 부주어법(不住於法)이라, 법에 머물지 않는 걸 실상이라고 그랬어요. 보이는 법에 머문다든지 보이지 않는 법에 머문다든지 그거는 실상이 아니고, 보이는 법에도 보이지 않는 법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걸 실상이라고. 그러면 그건 뭐냐. 상명법계(常冥法界)라, 항상 법계 법성에, 어두울 명자인데, 어두울 명자는 합한다는 뜻이거든요. 합하면 보이지 않으니까 보이지 않는 모습을 합한 모습으로 해석을 해서 명은 합이라 명하고 항상 법계에 명합을 해서, 그 실상례라는 것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늘 법계와 하나가 되는 거예요. 우주 법계 법성 실상과 하나가 되는 예경을 실상례라고 그래요. 그래서 상례제불(常禮諸佛)이라, 표시는 없는데 법계와 하나가 돼서 늘 법계불과 하나가 되고, 늘 법신불과 하나가 되고, 광명불과 하나가 되고, 그냥 항상 실상 법신 제불 광명과 항상 하나가 돼서, 표시 없이 항상 온전한 예경을 올리는 거를 실상례라 그런다. 그래서 그걸 운실상례(云實相禮)라. 그다음에 무진례를 제일 마지막으로 청량이 설명을 했는데, 일미진중(一微塵中)에, 한 가는 티끌 가운데, 견일체제불(見一切諸佛)하고, 부처님의 법신 실상이 조그마한 티끌 가운데도 일체제불이 다 계신다 이거에요. 일체제불이. 그게 화엄이에요. 하나 속에 모든 게 다 들어 있고, 모든 것이 다 하나 속에 들어 있고, 하나가 또 모든 것 속에 들어서 일종의 일체라, 일즉일체다,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하나가 곧 일체다. 이걸 원융무애라고 그러는데, 하나와 모든 것이 전혀 다른 게 아니에요. 또 그렇다고 해서 하나 하나 자리를 버리는 게 아니에요. 하나 자리 그대로 있으면서 일체가 되고 일체 자리 그대로 있으면서 하나가 돼요. 이거는 이제 더 설명이 필요한데, 오늘은 이거 설명할 수가 없고. 한 가느다란 티클 속에서 일체 모든 부처님을 친견을 해요. 이게 무진례에요. 또 하나하나 부처님 처소에서 또 하나하나의 예경을 올리는 것이 끝이 없다(一一佛所 一一禮無盡). 아주 아주 완전한 예경을 무진례라고 그래요. 一切衆生 眞實悉有 緣身性身 일체중생 진실실유 연신성신五體四大身 識心想念身 名爲緣身 오체사대신 식심상념신 명위연신圓極佛性身 大寂光明身 名爲性身원극불성신 대적광명신 명위성신禮敬發願 緣身歸源 契合性身예경발원 연신귀원 계합성신 그래서 결론은 뭐냐. 예경이 딴 게 아니라 일체중생의 진실실유 연신성신(一切衆生 眞實悉有 緣身性身)하니, 일체 중생에게는 진실로 다 인연의 몸과 본성의 몸이 있다 이거에요. 인연의 몸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받은 몸, 어머니, 아버지를 비롯해서 모든 음식과 환경과 토양을 통해서 인연으로 받은 몸을 연신이라고 한다. 연신을 하나 더 붙이면 연생신이라고 해요. 인연으로 생긴 몸이다. 연생신이 있는데 그 연생신이 나기까지는 인연으로 생기기 이전부터, 또 인연으로 된 몸이 사라진 이후까지 시작도 끝도 없이, 동서남북도 없이, 항상 상주하는, 항상 머물러 있는 법성신 자성신이 있다. 연생신은 의식과 판단으로 알아서 의식으로 식별을 하고 의식으로 판단을 하는데, 이 성신 법성신 자성신 불성신은 지혜로만 볼 수가 있어요. 지혜로만. 그래서 의식으로는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이제 연생신만 알고 사물 경계에만 집착하는 거를 미혹이라고 그래요, 미혹. 그다음에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정각인데, 미혹과 정각, 정각인데 뭘 깨달았냐. 이 자성신 법성신 불성신 이 성신을 아는 거를 그걸 깨달음이라고 해요. 식별이라고 하는 거, 인연 현상을 아는 거는 의식이라고 하는 식자, 구별한다는 별자, 식별이라고 그러는데 자성은 식별 대상이 아니에요. 정각 대상이에요. 정각. 그러면 예경이라고 하는 것은 연신에서 성신, 이 식별하는 의식 체계에서 정각하는 지혜를 얻은 것을 그거를 깨달음이라고 하는데, 예경은 바로 식별 의식으로 정각 지혜를 얻는 행위이다, 이런 말이죠. 그러면 연신은 뭐냐. 오체사대신(五體四大身), 오체라는 건 우리가 말한 두 무릎, 두 팔꿈치, 정수리 오체, 그 오체를 나타내고 있는 몸 또 사대신,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몸, 오체사대신과 식심상념신(識心想念身)이라, 식심으로, 인식하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몸이다. 상념, 생각 상 생각 념. 그래서 이 형체의 몸과 생각의 몸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 명위연신(名爲緣身)이다. 그것은 이름하여 연신이라고 한다. 그 몸형태 생각 그게 인연의 몸이죠. 그다음에 원극불성(圓極佛性身)이라고요. 둥글 원자, 궁극하다는 궁극의 극자. 이건 화엄가에서 쓰는 말인데, 원극이라는 말은 끝이 없어요, 원자는. 또 궁극이에요. 역시 끝이 없어요. 무변궁극. 원이라는 건 무변을 말해요. 둥글 원자는. 변방이 없어요. 또 마지막이 없어요. 그래서 이걸 원극이라고 그러는데, 이 불성은 변방도 없고 마지막도 없는 그런 아는 본성이 있다. 아는 본성 그건 원급 불성인데, 그 원급 불성의 몸이 우리 자성신이다, 그 말이죠. 또 대적광명신(大寂光明身), 광명은 광명인데 대적이요, 세간의 광명은 태양광 달빛광 촛불광 이게 형상광인데, 이 불성광명은 자취가 없어요. 그래서 그늘도 없고 시작된 것도 없고 끝나는 것도 없고 그래서 크게 고요한 광명이다. 불성광명은 햇빛이 아니에요. 불성광명은 촛불빛이 아니에요. 불성광명은 별빛도 아니고 달빛도 아니고 대적광명이여, 대적광명. 그림자도 없고 빛도 없는 대적광명. 이 대적광명신 이것을 이름하여 명위성신(名爲性身)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경과 발원(禮敬發願)은, 예경하고 발원하고 하는 것은 연신이 귀원(緣身歸源)하여, 연신이 근원으로 돌아가서, 계합성신(契合性身)이라. 계자도 이게 합한다는 뜻인데, 합할 합자도 합한다는 뜻이고. 성신과 계합하는 것이다. 합해지는 것이다. 예경발원은 연신이 귀원해서, 근원으로 돌아가서, 본래 우리 불성신 자성신과 합해지는 것을 예경이라고 그런다. 일체중생이 다 고통을 겪는데 문제는 이 자성신을 몰라서 고통을 겪는 거고. 죽음이라는 게 본래 없는데 식별로 죽음이 생겨요. 식별로. 그럼 삼매에 들어가면 식별이 가라앉아서 자성 광명이 드러나니까 삼매 속에는 죽음이 없고 식별로 나타날 때 죽음이 있다. 삼매 속에는 고통이 없고 식별로 나타날 때 고통이 있어요. 그래서 세상에서 많은 거를 구하게 되는데 그 구하게 되는 내용을 보면 몸에 좋은 걸 구하고 몸을 구하죠. 그다음에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중받는 걸 구해요. 사람의 존중을 구하죠. 그다음에 복락을 구해요. 복락을 오욕락이라고 그러는데. 그 오욕복락, 인간존중, 신체복상 그래서 이제 신복과 인복과 재복을 구하게 되는데, 이걸 왜 구하냐. 두려움 때문에 그래요. 왜 두려우냐. 이 죽음이 없고 어두움이 없는 또 고통이 없고 끝이 없는 불성신 광명신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불교는 여러 가지 선근 공덕 인연 또 여러 가지 좋은 인연 다 짓지마는 점점 불신이 깊어지면 그 불성신 광명신으로 돌아가는, 그래서 절대 해탈을 성취하는 그것이 불교인데, 그렇게 인도하는 그 첫 번째 법이 예불이다 이거죠. 그래서 예불은 다른 게 아니라 인연의 몸이 불성의 몸과 합해지는 행위이다. 그래서 예불 한 번 딱 하면 바로 돌아가요. 오래 갈 것도 없는 거라. 한 번만 딱 해봐, 오체투지 해봐요, 그러면은 인연의 몸이 불성의 몸으로 딱 돌아간단 말이에요. 왜 안 되냐. 이 식별심이 안 사라져서 그래요. 식별심이. 그래서 이 광명심이 가라앉고 식별심이 위로 올라와서, 그런데 자꾸 예경을 하면 삼매가 점점 나타나서 식별심은 다 사라지고 광명심이 나타나서 정각을 이루게 되는데 그 정각을 이룬 것을 인연의 몸이 근원으로 들어가고 또 인연의 몸이 자성의 몸과 합해진다고 한다.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